카스티야 연합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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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스티야 연합왕국은 13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 이베리아 반도와 해외 식민지를 지배했던 왕국이다. 레온 왕국에서 분리된 카스티야는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두 차례 연합 왕국을 이루었고, 1230년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가 레온 왕위를 계승하면서 카스티야-레온 연합왕국이 되었다. 1469년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결혼으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연합하여 가톨릭 군주 시대를 열었고, 레콘키스타를 완료하고 신대륙을 발견하는 등 번영을 누렸다.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봉 왕가가 통치했으며, 18세기 초 스페인 왕국으로 완전히 통합되었다.
레온 왕국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후신이며, 레온 왕국이 성립될 당시 카스티야는 레온 왕국 휘하의 한 영지였다. 11세기에 카스티야는 독립하여 독자적인 왕국이 되었고, 이후 레온과 카스티야는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두 차례 연합왕국을 이루었다.
2. 레온과 카스티야
1217년 페르난도 3세가 카스티야의 왕위를, 1230년에는 레온의 왕위를 모두 계승하면서 두 왕국은 동군 연합의 형태로 카스티야-레온 연합왕국으로 통합되었다. 페르난도 3세는 레온 왕국의 의회를 카스티야에 통합하고 공문서를 카스티야어로 작성하게 하여 두 왕국의 결합을 공고히 하고 카스티야어의 지배적 위치를 확립했다.
2. 1.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성립
레온 왕국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계승한 국가이며, 레온이 처음 세워졌을 때 카스티야는 레온 왕국에 속한 하나의 영지였다. 10세기경 레온은 한때 나바라 왕국에게 카스티야 지방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러나 11세기에 카스티야는 독립하여 독자적인 왕국이 되었다. 레온과 카스티야는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두 차례 연합왕국을 이루었다.
1198년, 카스티야의 공주 베렝겔라는 자신의 사촌 오빠인 레온의 왕 알폰소 9세와 결혼했고, 이듬해 아들 페르난도 3세를 낳았다. 1217년, 페르난도 3세는 어머니 베렝겔라로부터 카스티야의 왕위를 물려받았고, 1230년에는 아버지 알폰소 9세가 사망하면서 레온의 왕위까지 이어받게 되었다. 이후 두 왕국은 동군 연합의 형태로 카스티야-레온 연합왕국이 되었다.
페르난도 3세는 레온 왕국의 의회를 카스티야 의회에 통합시켜 두 왕국의 결합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공문서를 카스티야어로 작성하기 시작하면서, 카스티야어는 레온어, 바스크어, 갈리시아포르투갈어 등을 제치고 점차 지배적인 언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2. 2. 카스티야-레온 연합왕국의 성립
레온 왕국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후신으로, 초기 카스티야는 레온 왕국 휘하의 영지였다. 10세기경 레온은 나바라 왕국에 카스티야 지방을 빼앗기기도 했으나, 11세기에 카스티야는 독립하여 왕국이 되었다. 레온과 카스티야는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두 차례 연합왕국을 이루었다.
1198년 카스티야의 공주 베렝겔라는 사촌인 레온 왕 알폰소 9세와 결혼하여 아들 페르난도 3세를 낳았다. 페르난도 3세는 1217년 어머니 베렝겔라로부터 카스티야 왕위를 물려받았고, 1230년 아버지 알폰소 9세가 사망하자 레온 왕위도 계승했다. 이로써 두 왕국은 동군 연합인 카스티야-레온 연합왕국(또는 카스티야 왕관)으로 통합되었다.
페르난도 3세는 레온 왕국의 의회를 카스티야에 통합시켜 두 왕국의 결합을 공고히 했으며, 공문서를 카스티야어로 작성하게 함으로써 카스티야어가 레온어, 바스크어, 갈리시아포르투갈어 등을 제치고 점차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페르난도 3세는 과달키비르 계곡을 정복했고, 그의 아들 알폰소 10세는 알안달루스로부터 무르시아 왕국을 정복하여 카스티야 왕관의 영토를 더욱 확장했다. 이에 따라 카스티야 왕관의 국왕들은 "카스티야, 레온, 톨레도, 갈리시아, 무르시아, 하엔, 코르도바, 세비야의 왕이자 비스카이와 몰리나의 영주" 등 정복한 영지를 포함한 긴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왕위 계승자는 14세기부터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를 사용했다.
3. 트라스타마라 왕가
알폰소 11세가 사망한 후, 그의 적자인 페드로 1세와 사생아인 트라스타마라 백작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 사이에 왕위를 둘러싼 카스티야 내전이 벌어졌다. 이 내전에서 엔리케는 카스티야 귀족들과 일부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고,[6] 페드로 1세는 유대인, ''콘베르소'', 그리고 도시 의회의 지지를 받았다.
백년 전쟁의 국제 정세와 맞물려 치열하게 전개된 내전 끝에, 엔리케는 1369년 몬티엘 전투에서 페드로 1세를 살해하고 엔리케 2세로 즉위하여 트라스타마라 왕가를 열었다. 이 왕조 교체 과정에서 왕실의 재산이 상당 부분 귀족들에게 넘어갔으며, 카스티야 내 반유대주의가 급격히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7]
이후에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분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랭커스터 공작 존 고트가 페드로 1세의 딸 콘스탄스와의 결혼을 명분으로 카스티야 왕위를 주장하며 군사적 개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엔리케 2세의 손자인 엔리케 3세가 존 고트의 딸 랭커스터의 캐서린과 결혼하면서 왕조 분쟁은 마무리되었고,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 결혼을 통해 두 사람을 위한 아스투리아스 공이라는 칭호가 만들어졌다.
3. 1. 제1차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 (카스티야 내전)
알폰소 11세가 사망한 후, 그의 두 아들인 적자 페드로와 사생아인 트라스타마라 백작 엔리케 사이에 왕위를 둘러싼 내전이 벌어졌다. 이 내전은 백년 전쟁의 일부로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개입하는 양상을 띠었다.
처음에는 페드로가 적법한 왕위를 계승했지만, 엔리케는 카스티야 귀족과 성직자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반기를 들었다.[6] 반면 페드로는 유대인, 콘베르소, 도시 의회의 지지를 받았다. 페드로는 잉글랜드의 흑태자 에드워드와 동맹을 맺고, 1367년 나헤라 전투에서 엔리케 2세의 동맹군을 물리쳐 왕위를 되찾았다.
그러나 페드로가 에드워드에게 약속했던 전쟁 비용을 지불하지 않자, 흑태자는 카스티야를 떠났다. 프랑스로 망명했던 엔리케는 이 기회를 틈타 돌아와 전쟁을 재개했다. 결국 1369년 몬티엘 전투에서 페드로는 패배하여 살해당했고, 엔리케가 엔리케 2세로 즉위하며 트라스타마라 왕가가 시작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왕실의 재산이 상당 부분 귀족들에게 넘어갔으며, 카스티야 내 반유대주의가 심화되는 경향을 보였다.[7]
왕위 계승 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371년, 흑태자 에드워드의 동생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페드로의 딸 콘스탄스와 결혼했다. 1386년, 곤트의 존은 아내 콘스탄스가 1361년 세비야 코르테스에 따라 정당한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며 군대를 이끌고 라코루냐에 상륙하여 도시를 점령했다. 이후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폰테베드라, 비고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엔리케 2세의 아들인 후안 1세에게 왕위를 넘길 것을 요구했다.
후안 1세는 이를 거절했지만, 자신의 아들인 엔리케 3세를 곤트의 존의 딸 랭커스터의 캐서린과 결혼시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엔리케와 캐서린을 위해 아스투리아스 공이라는 칭호가 새로 만들어졌다. 이 결혼을 통해 오랜 왕위 계승 전쟁이 종결되었고,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으며 카스티야와 잉글랜드 사이에 평화가 정착되었다.
3. 2. 아라곤 연합왕국과의 관계
엔리케 3세가 사망한 후, 그의 동생인 안테케라의 페르난도는 왕위를 거절하고 엔리케 3세의 왕비 랭커스터의 캐서린과 함께 어린 아들 후안 2세의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1412년 카스페 합의를 통해 페르난도는 아라곤 연합왕국의 왕위에 오르면서 카스티야를 떠났다.
섭정이었던 캐서린 왕비가 사망하자, 14세의 나이로 친정을 시작한 후안 2세는 사촌인 아라곤의 마리아와 결혼하고, 궁정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이었던 알바로 데 루나에게 국정 운영을 상당 부분 맡겼다. 이 시기 카스티야 궁정에서는 아라곤 왕 페르난도 1세의 아들들, 즉 '아라곤의 인판테스'(Infantes de Aragón|인판테스 데 아라곤es)라 불리는 왕자들이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이들은 카스티야의 일부 대귀족들과 연합했다. 이에 맞서 알바로 데 루나는 카스티야의 소귀족, 도시 세력, 성직자 등과 손을 잡았다.
아라곤 왕자들과 그 동맹 세력의 영향력 확대 시도는 카스티야 내부의 반감을 샀고, 결국 알바로 데 루나가 이끄는 세력과 아라곤 인판테스 세력 간의 갈등은 1429년부터 1430년까지 카스티야와 아라곤 연합왕국 사이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에서 알바로 데 루나가 승리하여 아라곤의 인판테스들을 카스티야에서 몰아냈다.
3. 3. 제2차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
엔리케 4세는 아버지 후안 2세 시대에 악화된 귀족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두 번째 아내인 포르투갈의 후아나 왕비가 후아나 공주를 낳자, 카스티야 귀족들은 이 아이가 왕비와 총신 벨트란 데 라 쿠에바 사이의 불륜으로 태어난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로 인해 후아나 공주는 '라 벨트라네하'(La Beltraneja, 벨트란의 딸이라는 뜻)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귀족들은 후아나 공주의 왕위 계승권을 부정하며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인 알폰소 왕자를 후계자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계속되는 귀족들의 반란과 압력에 시달린 엔리케 4세는 결국 알폰소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후아나 공주를 계승 서열에서 제외하는 조약에 서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알폰소 왕자가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엔리케 4세는 알폰소의 누나이자 자신의 또 다른 이복동생인 이사벨과 기산도 황소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을 통해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을 후계자로 인정하는 대신, 이사벨의 결혼은 반드시 자신이 선택한 사람과 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4. 가톨릭 군주 시대
1469년 카스티야의 공주였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왕위 계승자 페르난도 2세는 바야돌리드에서 결혼했다. 1474년 이사벨의 이복 오빠인 엔리케 4세가 사망한 후 발발한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에서 이사벨은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카스티야의 왕위에 올랐다. 1479년 페르난도 2세가 아라곤의 왕위를 계승하면서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동군연합 관계를 형성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두 군주에게 가톨릭 군주(스페인어: los Reyes Católicoses)라는 칭호를 부여했으며, 이들의 공동 통치는 이후 통일 스페인 왕국의 초석을 다지는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가톨릭 군주 시대는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내부적으로는 산타 에르만다드(성스러운 형제단) 창설 등을 통해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며 중앙 집권 체제를 다졌다. 외부적으로는 1492년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세력인 그라나다를 정복하여 수백 년간 이어진 레콘키스타를 완수했다. 같은 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를 후원하여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신대륙 식민지 개척 시대를 열었으며, 카나리아 제도 정복을 완료하고 북아프리카로 세력을 확장하는 등 활발한 대외 정책을 펼쳤다.
비록 두 왕국은 형식적으로 별개의 법률과 제도를 유지했지만, 인구와 영토 면에서 우위에 있던 카스티야가 연합 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504년 이사벨 1세 사후 왕위 계승 문제로 잠시 혼란이 있었으나, 가톨릭 군주 시대는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이 강력한 유럽 국가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4. 1.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1469년 10월, 카스티야의 공주였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왕위 계승자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의 바야돌리드에 있는 비베로 궁전에서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은 당시 카스티야 국왕이자 이사벨의 이복 오빠였던 엔리케 4세의 반대 속에 이루어졌다. 엔리케 4세는 기산도 황소 조약을 통해 이사벨을 후계자로 인정하는 대신, 자신이 승인하는 인물과의 결혼을 조건으로 내걸었으며, 아라곤보다는 포르투갈이나 프랑스와의 동맹을 원했다. 또한 두 사람은 가까운 친척 관계였기에 교황의 허가가 필요했는데, 페르난도의 아버지가 교황청의 특별 허가를 위조하여 결혼이 성사되었고, 이후에야 정식 허가가 도착했다.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이 자신의 승인 없이 페르난도와 결혼하자 조약을 위반했다며 후계자 자격을 박탈하고 자신의 딸인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1474년 엔리케 4세가 사망하자, 이사벨 지지 세력과 후아나 지지 세력 간에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1479년 이사벨의 승리로 끝났고, 같은 해 페르난도 2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라곤의 왕위에 오르면서 카스티야와 아라곤 두 왕국은 동군연합의 형태로 통합되었다. 이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두 사람에게 가톨릭 군주(스페인어: los Reyes Católicoses)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결혼으로 두 군주는 공식적으로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시칠리아의 군주"로 불렸지만, 연합은 인적 통합에 가까웠다. 이사벨은 카스티야 연합왕국을, 페르난도는 아라곤 연합왕국을 각자 통치했으며, 두 왕국의 행정 기구와 법률, 의회(코르테스)는 대부분 분리되어 유지되었다. 유일한 공통 기관은 종교 재판소였다. 그러나 카스티야는 아라곤에 비해 영토가 3배 넓고 인구(카스티야 약 430만, 아라곤 약 100만)도 4배 이상 많았기 때문에 연합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가톨릭 군주는 레콘키스타 과정에서 강력해진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지역 치안 조직인 '산타 에르만다드'(성스러운 형제단)를 창설하여 치안 유지와 법 집행을 강화했다. 또한 귀족들의 사적인 전쟁을 금지하고, 봉건 성채를 파괴했으며, 레콘키스타로 새로 얻은 영토의 총독(아델란타도) 권한을 축소했다. 1480년 톨레도에서 열린 코르테스에서는 각 도시에 국왕이 임명한 대표인 코레히도르(스페인어: corregidores)를 파견하여 도시 행정을 감독하도록 했다. 왕실 사법권을 강화하여 아우디엔시아(스페인어: Audienciaes)를 최고 사법 기관으로 삼았으며, 1495년에는 군사 기사단들을 국왕의 통제 하에 두었다. 종교적으로는 가톨릭 교회의 통일을 추구하며 수도회를 개혁하고, 유대인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1492년에는 개종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하여, 카스티야에서만 약 5만에서 7만 명의 유대인이 추방된 것으로 추정된다. 1502년부터는 무슬림 인구에 대해서도 강제 개종 정책을 시행했다.
가톨릭 군주 통치 기간 동안 영토 확장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1478년부터 1497년까지 카나리아 제도의 남은 섬들(그란 카나리아, 라 팔마, 테네리페)을 정복했다. 1492년 1월 2일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를 함락하고 알람브라 궁전에 입성함으로써 수백 년간 이어진 레콘키스타를 완수했다. 같은 해, 두 군주의 후원을 받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하여 신대륙 발견과 정복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497년에는 북아프리카의 멜리야를 정복했으며, 이탈리아 전쟁에 개입하여 프랑스와 싸우던 아라곤을 지원했고, 1504년에는 나폴리 왕국을 아라곤 왕국령으로 재정복했다.
1504년 11월 26일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카스티야 왕위는 그녀의 딸인 후아나에게 계승되었다. 후아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미남왕 필리페 1세와 결혼한 상태였다. 이사벨은 유언으로 후아나의 정신 건강 문제를 우려하여, 후아나가 통치할 의사나 능력이 없을 경우 아버지 페르난도 2세가 섭정을 맡도록 지정했다. 1505년 '살라망카 협정'을 통해 후아나, 필리페 1세, 페르난도 2세가 공동으로 통치하기로 합의했으나, 카스티야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필리페 1세와 페르난도 2세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1506년 빌라파필라 조약을 통해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 통치권과 인디아스(아메리카 식민지) 영유권을 포기하고 아라곤으로 물러났으며, 필리페 1세가 후아나와 함께 카스티야의 공동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필리페 1세는 그 해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페르난도 2세가 1507년 다시 카스티야의 섭정으로 복귀했다. 후아나는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여 1510년 아버지 페르난도 2세의 명령으로 토르데시야스의 산타 클라라 수녀원에 유폐되었고, 이후 40년 이상 그곳에서 지내다 생을 마감했다.
1512년, 페르난도 2세가 이끄는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은 나바라 왕국을 침공하여 피레네 산맥 이남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고 카스티야에 병합시켰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이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4. 2. 레콘키스타 완료와 신대륙 발견
1469년 카스티야의 공주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왕세자 페르난도 2세가 바야돌리드의 비베로 궁전(Palacio de Vivero)에서 비밀리에 결혼했다. 이사벨의 이복 오빠인 엔리케 4세는 이 결혼을 자신과의 약속 위반으로 간주하고 이사벨 대신 자신의 딸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로 인해 1474년 엔리케 4세 사후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고, 1479년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가 최종 승리했다. 같은 해 페르난도 2세가 아라곤 왕위에 오르면서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한 군주 아래 통합되었으나, 이는 동군연합 형태로 각 왕국은 별도의 법률과 제도를 유지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이들 부부에게 가톨릭 군주(los Reyes Católicos)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두 왕국은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시칠리아의 군주"라는 칭호를 공유했지만, 영토 규모(아라곤의 3배)와 인구(아라곤의 4배 이상) 면에서 우위에 있던 카스티야가 연합 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레콘키스타 과정에서 카스티야 귀족들은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가톨릭 군주는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시행했다. 지방 치안 조직인 산타 에르만다드(Santa Hermandad, 성스러운 형제단)를 창설하여 치안 유지와 왕권 집행을 강화했고, 귀족 간의 사적인 전쟁을 금지했으며, 아델란타도(Adelantado, 변경 지역 군사 총독)의 권한을 축소했다. 또한, 각 도시에 국왕이 임명한 행정관인 코레히도레스(Corregidores)를 파견하여 지방 행정에 대한 중앙 통제를 강화했다. 종교적으로는 종교 재판소를 통해 가톨릭 신앙의 통일성을 추구하며 유대인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이를 거부하는 이들을 박해했다.
가톨릭 군주는 이베리아 반도 내 이슬람 세력 축출을 위한 레콘키스타 완수에 힘썼다. 1487년부터 1497년까지 군대를 동원하여 카나리아 제도의 그란 카나리아, 라 팔마, 테네리페 섬을 정복했다. 마침내 1492년 1월 2일,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었던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알람브라 궁전에 입성함으로써 수 세기에 걸친 레콘키스타를 완료했다. 같은 해, 군주들은 개종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카스티야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했으며, 약 5만 명에서 7만 명의 유대인이 추방된 것으로 추정된다. 1502년부터는 무슬림 인구에 대한 강제 개종 정책을 시작했다.
또한 1492년, 가톨릭 군주는 제노바 출신의 항해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서회항 계획을 후원했다. 콜럼버스는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찾으려 했으나 대신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했고, 이는 신대륙 발견과 이후 스페인 제국에 의한 아메리카 정복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레콘키스타 완료 이후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은 대외 팽창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 1497년 북아프리카의 멜리야를 정복하고, 1504년에는 이탈리아 전쟁에 개입하여 아라곤을 도와 나폴리를 재정복했다.
5. 합스부르크 왕가와 제국
1504년 이사벨 1세 여왕 사후, 딸 후아나가 왕위를 계승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필리페 1세와 결혼하며 합스부르크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사벨 1세는 후아나의 통치 능력을 우려해 아버지 페르난도 2세를 섭정으로 지명했다. 이는 사위 필리페 1세와 장인 페르난도 2세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이어졌다. 카스티야 귀족들의 지지를 얻은 필리페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갈등 끝에, 1506년 페르난도 2세는 아라곤으로 물러나고 필리페 1세가 후아나와 공동 군주가 되었다(비야파필라의 합의). 그러나 같은 해 필리페 1세가 사망하자 페르난도 2세가 다시 섭정이 되었고, 후아나는 1510년부터 토르데시야스 수녀원에 유폐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1512년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은 나바라 왕국 남부를 정복하여 카스티야에 병합했다. 이는 카를로스 1세 시대 스페인 제국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5. 1. 후아나 1세 시대
1504년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그녀의 딸 후아나가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후아나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어 '미친 후아나'(Juana la Locaes)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사벨 1세는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여, 후아나가 "책무를 다하지 못할 때를 대비하여" 그녀의 아버지인 페르난도 2세를 섭정으로 임명했다.후아나의 남편인 펠리페 1세는 카스티야 귀족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장인인 페르난도 2세와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 1505년 '살라망카 협정'을 통해 펠리페 1세, 페르난도 2세, 후아나가 공동으로 정부를 운영하기로 결정되었으나, 펠리페와 페르난도 사이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결국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에서의 섭정 권한을 포기해야 했다.
1506년 비야파필라의 합의에 따라 페르난도 2세는 아라곤으로 돌아갔고, 펠리페 1세가 아내 후아나와 함께 카스티야의 공동 군주로 인정받았다. 이 합의로 페르난도 2세는 신대륙(인디에스)에 대한 영주권까지 포기했지만, 왕국 수입의 절반은 유지하기로 했다. 후아나와 펠리페는 자신들의 칭호에 인디에스 왕국, 섬, 대양 해안 지역을 추가했다.
그러나 1507년 펠리페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페르난도 2세는 다시 카스티야로 돌아와 후아나의 섭정을 맡게 되었다. 1510년, 페르난도 2세의 명령으로 후아나의 정신병이 심해졌다는 이유로 토르데시야스의 산타 클라라 수녀원에 유폐되었고, 이 감금 생활은 40년 이상 지속되었다.
1512년,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동맹을 맺고 나바라 왕국을 침공하여 피레네산맥 남쪽의 영토 대부분을 카스티야에 병합하였다.
5. 2. 카를로스 1세 시대

카를로스 1세는 왕조 간 결혼과 상속을 통해 카스티야, 아라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았다.
- 1506년: 아버지 펠리페 1세가 사망하면서 네덜란드의 통치자가 되었다.
- 1516년: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자, 어머니 후아나 여왕과 함께 아라곤과 카스티야(아메리카 식민지 포함)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 후아나는 정신 질환을 이유로 계속 유폐되어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카를로스가 단독으로 통치했다.
- 1519년: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자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어, 카를 5세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2]
하지만 카를로스 1세는 카스티야에서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는 벨기에 헨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카스티야어에 능숙하지 못했다. 더욱이 카스티야에 도착하기도 전에 중요한 관직에 플랑드르 출신 인물들을 임명하고, 자신의 궁정을 유지하기 위해 카스티야 왕국의 재정을 사용하는 등 카스티야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많은 카스티야인들은 카스티야에서 나고 자란 카를로스의 동생 페르디난트를 더 선호했다.
1518년 바야돌리드에서 열린 카스티야 의회(코르테스)에서는 왈롱 출신인 장 드 소바쥬(Jean de Sauvage)가 의장으로 임명되자 격렬한 항의가 일어났다. 의원들은 외국인의 의회 참여를 거부하며 저항했고, 부르고스 대표 후안 데 주멜(Juan de Zumel)의 주도로 카를로스에게 카스티야 법을 존중하고, 정부 요직에서 외국인을 해임하며, 카스티야어를 배울 것을 요구했다. 카를로스는 이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맹세한 뒤에야 60만 두카트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다.
카를로스는 신성 로마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해 제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카스티야에서 확보하고자 했다. 당시 카스티야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금과 은 덕분에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지역 중 하나였다. 카를로스는 카스티야에서의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카스티야인들은 자신들의 왕국이 거대한 제국에 흡수될 것을 우려했다. 카를로스가 의회에서 한 약속들을 지키지 않자 왕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커졌다.
1520년 톨레도 의회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의회는 왕에게 추가 보조금 지급을 거부했다. 이후 라코루냐에서 열린 의회에서는 많은 의원들이 매수되거나 참석을 거부한 끝에 보조금이 승인되었지만, 이에 분노한 카스티야 주민들은 부조금 승인에 찬성한 의원들의 집을 불태우는 등 격렬하게 반발했다. 결국 1520년 카를로스가 카스티야를 떠나자 코무네로스 전쟁(시민 전쟁)이 발발했다. 반란군은 유폐된 후아나 여왕을 찾아가 그녀를 유일한 군주로 지지하고 카를로스를 폐위하는 문서에 서명해달라고 요청했으나, 후아나는 이를 거부했다. "코무네로스"라 불린 시민군은 1년 뒤인 1521년에 왕당파 군대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이 전쟁 이후 카스티야 의회(코르테스)의 권한은 크게 축소되어 단순한 자문 기구로 전락했다. 카를로스는 반대파가 후아나를 다시 내세우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가 1555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감금했으며, 이후 스페인의 유일한 군주가 되었다.
5. 3. 펠리페 2세 시대
펠리페 2세는 아버지 카를로스 1세의 정책을 계승했지만, 카스티야를 스페인 제국의 중심으로 삼아 마드리드에서 모든 정무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제국을 운영했다. 다른 스페인 지역들은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유지하며 총독에 의해 다스려졌다.카를로스 1세 시대부터 제국의 막대한 재정 지출 부담은 주로 카스티야에 집중되었는데, 펠리페 2세 시대에는 이 부담이 4배로 늘어났다. 그는 기존 세금을 인상했을 뿐 아니라, 1567년에는 Excusado|엑스쿠사도spa와 같은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다. 1590년에는 코르테스(의회)가 식량에 대한 세금인 Millones|밀리오네스spa를 승인하기도 했다.
늘어난 지출을 감당하지 못해 그의 궁정은 여러 차례(적어도 1575년, 1596년) 파산을 선언해야 했고, 이는 각 도시에도 큰 부담을 주었다. 카스티야는 1575년부터 불경기에 접어들었으며, 이는 스페인 전체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재정 압박과 경제 침체는 도시들의 산업화를 더디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독실한 가톨릭교 신자였던 펠리페 2세는 1567년 Pragmática|프라그마티카spa 선포를 통해 모든 모리스코(스페인의 무슬림 후예)들에게 이슬람 관습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강제하는 법을 시행했다. 이 법령은 모리스코들의 종교적, 언어적, 문화적 자유를 크게 제한하여 결국 모리스코 반란(1568년~1571년)을 촉발했다. 이 반란은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에 의해 진압되었다.
5. 4. 펠리페 3세, 4세, 카를로스 2세 시대
펠리페 2세 시대까지 정부 기관의 요직은 알칼라 대학교나 살라망카 대학교 등에서 교육받은 하급 지주 계층이 주로 차지하였다.[13][8] 그러나 펠리페 3세 시대부터 귀족들이 다시 국가 통치권을 주장하며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13][8] 이 시기 스페인에서는 혈통 정화가 이루어졌고, 종교 박해의 일환으로 1609년 모리스코 추방령이 선포되기도 했다.[8]펠리페 4세 시대에 스페인은 아메리카 식민지로부터의 수입 감소와 네덜란드 독립 전쟁 등으로 인해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며 또다시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13] 펠리페 4세의 총신(valido)이었던 올리바레스 백작 공작 (1621년-1643년 재임)은 제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련의 개혁을 시도했다.[8] 대표적인 개혁안은 '우니온 데 아르마스'(Unión de Armases)로, 14만 명 규모의 예비군을 창설하고 왕국 내 모든 영토가 인구 비례에 따라 병력과 비용을 부담하도록 하는 것이었다.[13][8] 이는 연합 왕국을 구성하는 각 지역의 정치적 통합을 목표로 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스페인 왕국은 여러 왕국의 연합체 형태로 남게 되었다.[13][8]
1659년 올리바레스 백작 공작이 실각한 후, 루이스 멘데스 데 아로가 1665년까지 펠리페 4세의 새로운 총신이 되었다.[13][8] 그는 포르투갈의 반란, 카탈루냐 반란, 안달루시아의 반란 등 이전 시대에 발생했던 내분을 완화하고 유럽 내에서 평화를 이루려 노력했다.[8]
1665년 펠리페 4세가 사망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허약하여 통치 능력이 부족했던[13] 카를로스 2세가 즉위하자 스페인은 여러 총신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정치적 혼란과 경제 침체를 겪었다.[13][8] 카를로스 2세는 평생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에 휘둘렸으며,[13] 1700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스페인의 왕위를 놓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13][8]
이 전쟁이 끝난 후, 카스티야 연합왕국을 포함한 모든 영토는 스페인 왕관 아래 단일한 스페인 왕국으로 완전히 통합되었다.[13][14][8][9]
6.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영토
카스티야 연합왕국은 이베리아 반도 내 여러 왕국과 영토를 통합하여 형성되었으며, 이는 현대 스페인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대항해시대 이후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걸쳐 광대한 해외 식민지를 건설하고 통치했다. 연합왕국을 구성했던 구체적인 영토는 스페인 본토와 해외 식민지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문단에서 설명한다.
6. 1. 스페인

카스티야 연합왕국은 현대 스페인의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 된 정치체였다. 이 연합왕국은 이베리아 반도 내 여러 왕국과 영토를 통합하여 구성되었으며, 주요 구성 지역은 다음과 같다.
- 카스티야라비에하
- 카스티야라누에바
- 레온 왕국
- 카스티야 왕국
- 아스투리아스 공국
- 갈리시아 왕국
- 비스카이아 영지
- 기푸스코아
- 알라바
- 에스트레마두라
- 톨레도 왕국
- 무르시아 왕국
- 코르도바 왕국
- 하엔 왕국
- 세비야 왕국
- 그라나다 왕국 (1492년 이후 편입)
- 나바라 왕국 (1512년 이후 편입)
6. 2. 해외 식민지
카스티야 연합왕국은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걸쳐 광대한 해외 식민지를 건설하고 통치했다. 초기 식민지 개척 이후, 식민 행정은 주로 부왕령(Viceroyalty)과 총독령(Captaincy General) 체제로 운영되었다.
- 카나리아 왕국 (Reino de Canariases)
- 인디아스 부왕령 (Virreinato de las Indiases, 1492년–1526년)
북반구 (Septentrionales)
-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Virreinato de la Nueva Españaes, 1535년 이후): 북아메리카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스페인 식민지를 관할하는 핵심 행정 단위였다.
- 멕시코 왕국 (Reino de Méxicoes): 멕시코 왕립 청중원 (Real Audiencia de Méxicoes)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이 직접 주재했다.
- 갈리시아 신왕국 (Nuevo Reino de Galiciaes)
- 과테말라 왕국 또는 과테말라 총독령 (Capitanía General de Guatemala or Reino de Guatemalaes)
- 누에바비스카야 왕국 (Reino de Nueva Vizcayaes)
- 레온 신왕국 (Nuevo Reino de Léones)
- 뉴멕시코 산타페 (Santa Fe de Nuevo Méxicoes)
- 누에바 엑스트레마두라 (Nueva Extremaduraes)
- 누에바나바라 주 (Provincia de Nueva Navarraes)
- 캘리포니아스 주 (Provincia de Las Californiases)
- 베네수엘라 주 (Provincia de Venezuelaes): 이후 베네수엘라 총독령으로 통합되었다.
- 필리핀 총독령 (Capitanía General de las Filipinases): 스페인령 동인도의 중심지였다 (1571년 이후).
- 쿠바 총독령 (Capitanía General de Cubaes)
- 푸에르토리코 총독령 (Capitanía General de Puerto Ricoes)
- 산토도밍고 총독령 (Capitanía General de Santo Domingoes)
- 유카탄 총독령 (Capitanía General de Yucatánes)
남반구 (Meridionales)
- 페루 부왕령 (Virreinato del Perúes, 1542년 이후): 남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를 관할하는 주요 행정 단위였다.
- 티에라 피르메 주 (Provincia de Tierra Firmees): 파나마 왕립 청중원 (Real Audiencia de Panamaes) [1차, 1538년–1543년], [2차, 1564년–1751년])에 의해 관리되었다.
- 그라나다 신왕국 (Nuevo Reino de Granadaes): 산타페데보고타 왕립 청중원 (Real Audiencia de Santa Fe de Bogotáes)에 의해 관리되었다. 1538년 이후 설립되었으며, 이후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1717년–1724년, 1739년 이후)으로 승격되었다.
- 키토 왕국 또는 키토 관구 (Reino de Quito or Presidencia de Quitoes): 키토 왕립 청중원 (Real Audiencia de Quitoes)에 의해 관리되었다.
- 페루 왕국 (Reino de Perues): 리마 왕립 청중원 (Real Audiencia de Limaes)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페루 부왕이 직접 주재했다.
- 차르카스 주 (Provincia de Charcases): 차르카스 왕립 청중원 (Real Audiencia de Charcases)에 의해 관리되었다.
- 칠레 총독령 (Capitanía General de Chilees): 1541년 이후 설립되었으며, 비공식적으로 칠레 왕국(Reino de Chilees)으로 불렸다.
-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 (Viceroyalty of the Río de la Plataes): 1776년 이후 설립되었다. 이전에는 라플라타 총독령 (Gobernácion del Río de la Plataes 부에노스아이레스 왕립 청중원 (Real Audiencia de Buenos Aireses) 관할, 1661년–1672년)이었다.
- 베네수엘라 총독령: 1777년 이후 자치령으로 병합되었다.
부왕령의 최고 통치자인 부왕(Viceroy, 어원적으로 "왕의 자리에 있는 자")은 해당 지역의 모든 공권력을 장악했다. 부왕은 카스티야 왕관의 군주에 의해 자유롭게 임명되고 해임될 수 있었으며, 군주의 명령에 따라 통치했다. 누에바에스파냐와 페루의 부왕은 식민지 내에서 군주와 같은 권위를 가졌으나, 실제로는 본국 군주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7. 역대 군주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역대 군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카스티야의 군주 및 스페인의 군주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카스티야 연합왕국은 보르고냐 왕조, 트라스타마라 왕조, 합스부르크 왕조, 부르봉 왕조 등 여러 왕조를 거치며 통치되었다. 각 왕조별 주요 군주는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7. 1. 보르고냐 왕조
- 페르난도 3세 (1230년~1252년)
- 알폰소 10세 (1252년~1284년)
- 산초 4세 (1284년~1295년)
- 페르난도 4세 (1295년~1312년)
- 알폰소 11세 (1312년~1350년)
- 페드로 (1350년~1369년)
7. 2. 트라스타마라 왕조
- 엔리케 2세 (1369년~1379년)
- 후안 1세 (1379년~1390년)
- 엔리케 3세 (1390년~1406년)
- 후안 2세 (1406년~1454년)
- 엔리케 4세 (1454년~1474년)
- 이사벨 1세 (1474년~1504년)
- 후아나 1세 (1504년~1516년)
카스티야 내전은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 지지자들과 페드로 1세 지지자들 사이의 투쟁이었다. 엔리케는 카스티야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고,[6] 페드로는 유대인, ''콘베르소''(개종자), 도시 의회의 지지를 받았다. 트라스타마라 가문이 승리하면서 왕실 재산이 귀족들에게 상당히 이전되었으며, 이 왕조 변화는 카스티야 내 반유대주의가 급격히 강화되는 시기와 맞물렸다.[7]
알폰소 11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인 적자 페드로와 서자이자 트라스타마라 백작인 엔리케 사이에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이 분쟁은 백년 전쟁의 일부로 확대되어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개입하게 되었다. 알폰소 11세는 마리아 데 포르투갈과 결혼하여 페드로를 낳았지만, 애인 엘레오노르 데 구즈만과의 사이에서 엔리케를 포함한 여러 서자를 두었다. 페드로가 왕위에 오르자 엔리케는 그의 왕위 계승권에 도전했다.
왕위를 둘러싼 형제간의 싸움에서 페드로는 웨일스 공 에드워드("흑태자")와 동맹을 맺었다. 1367년, 흑태자는 나헤라 전투에서 엔리케 2세의 동맹군을 격파하여 페드로가 다시 왕위를 차지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페드로가 약속한 전쟁 비용을 지불하지 않자 흑태자는 카스티야를 떠났다. 프랑스로 피신했던 엔리케는 이 기회를 틈타 다시 군사를 일으켰고, 1369년 몬티엘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페드로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1371년, 흑태자의 동생인 랭커스터 공작 존 고트는 페드로 1세의 딸 콘스탄스와 결혼했다. 1386년, 존 고트는 1361년 세비야 코르테스(의회)의 결정에 따라 콘스탄스가 정당한 왕위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카스티야 왕위를 요구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라 코루냐에 상륙하여 도시를 점령한 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폰테베드라, 비고까지 진격했다. 그는 엔리케 2세의 아들인 후안 1세에게 콘스탄스를 위해 왕위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후안 1세는 이를 거절했지만, 대신 자신의 아들인 엔리케 왕세자와 존 고트의 딸 랭커스터의 캐서린의 결혼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엔리케와 캐서린을 위해 아스투리아스 공이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이 결혼 동맹은 길었던 왕조 분쟁을 종식시키고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통치 기반을 공고히 했으며, 잉글랜드와 카스티야 사이에 평화를 가져왔다.
7. 3. 합스부르크 왕조
카스티야 연합왕국을 통치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국왕은 다음과 같다.국왕 | 재위 기간 |
---|---|
카를로스 1세 | 1516년 ~ 1556년 |
펠리페 2세 | 1556년 ~ 1598년 |
펠리페 3세 | 1598년 ~ 1621년 |
펠리페 4세 | 1621년 ~ 1665년 |
카를로스 2세 | 1665년 ~ 1700년 |
7. 4. 부르봉 왕조
- 펠리페 5세 (1700년~1715년)
참조
[1]
서적
El dialecto leonés
Curpo facultativo de archiveros, bibliotecarios y arqueologos
1906
[2]
서적
Manual elemental de gramática histórica española
https://archive.org/[...]
Librería General de Victoriano Suárez
1904
[3]
서적
The Medieval Spain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10-11
[4]
서적
La Navarra marítima
Pamiela
[5]
서적
An economic history of Spain
Princeton University Press
[6]
서적
Iglesia, nobleza y poderes urbanos en los reinos cristianos de la Península Ibérica durante la Edad Media
https://medievalista[...]
Sociedad Española de Estudios Medievales
[7]
학술지
Los judíos de Castilla ante el cambio de dinastía
https://revistas.una[...]
Universidad de Navarra
[8]
서적
The Companion to British Histor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0-10-30
[9]
서적
El catalán: Una lengua de Europa para compartir
https://books.google[...]
Univ. Autònoma de Barcelona
2020-10-30
[10]
서적인용
El dialecto leonés
Curpo facultativo de archiveros, bibliotecarios y arqueologos
1906
[11]
서적인용
Manual elemental de gramática histórica española
https://archive.org/[...]
Librería General de Victoriano Suárez
1904
[12]
문서
카를로스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3]
웹인용
The Companion to British History
http://books.google.[...]
Routledge
[14]
웹인용
El catalán: Una lengua de Europa para compartir
http://books.google.[...]
Univ. Autònoma de Barcel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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